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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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1886-1969)는 미국의 해군 제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다. 그는 190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전함과 구축함을 지휘했으며,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모함 4척을 격침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태평양 함대 부사령관, 중앙 태평양 함대 사령관, 제5함대 사령관을 역임하며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 등 주요 작전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태평양 함대 사령관과 해군대학 총장을 거쳐 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했다. 그의 뛰어난 지휘 능력과 신중한 전략으로 "제독 중의 제독"으로 평가받았으며, 미 해군 구축함과 해군대학 강당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스프루언스는 190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5] 전기 공학 분야에서 추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사관학교 동기생으로는 패트릭 N. L. 벨링거, 윌리스 W. 브래들리, 조지 M. 코트, 헨리 K. 휴잇, 조나스 H. 잉그램, 클로드 A. 존스 등이 있었다.[6]
스프루언스는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한 전함 아이오와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백색 함대의 세계 일주에 참여하고, 여러 척의 구축함과 전함 미시시피를 지휘하는 등 다양한 해상 경력을 쌓았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졸업 후 소위 후보생으로 전함 아이오와(BB-4)에 탑승했다. 1907년 "아이오와"가 제적되자 대백색함대의 한 척이었던 신예 전함 미네소타(BB-22)로 전속되어 12월부터 세계 순항에 참가했다. 1908년 10월, 일본 기항 중 가든 파티에서 도고 헤이하치로를 만났고, 훗날 상관 체스터 니미츠만큼은 아니지만 일본 국민에 대한 경애심을 품게 되었다.
1909년 2월 귀국 후, 제너럴 일렉트릭사에서 1년간 전기 기술 연수를 받았다. 1910년 소위로 임관하여 전함 코네티컷(BB-18)에 탑승했고, 1911년 10월 순양함 신시내티(C-7)의 기관장교로 부임했다. 1912년 중위로 승진, 1913년 구축함 베인브리지(DD-1)의 함장이 되었다.
2. 1. 출생 및 가정 환경
스프루언스는 1886년 7월 3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알렉산더 스프루언스와 애니 히스 스프루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성장했다.[4] 인디애나폴리스 공립학교를 다녔고 쇼트리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1906년 9월 12일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5] 몇 년 후 전기 공학 분야에서 추가 교육을 받았다.
2. 2. 유년 시절 및 교육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는 1886년 7월 3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알렉산더 스프루언스와 애니 히스 스프루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4] 그는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성장했으며,[4] 인디애나폴리스 공립학교와 쇼트리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1906년 9월 12일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5] 몇 년 후 전기 공학 분야에서 추가적인 실무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집안은 노예를 소유한 대규모 농장 경영과 상인을 거쳐 인디애나폴리스에 정착한 가문이었고, 어머니의 친가 히스가는 매사추세츠주의 양키("네덜란드계 이민"의 뜻) 9대손에 해당되는 볼티모어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1903년, 경제적으로 어려워 무료로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애나폴리스(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애나폴리스에서는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린치 (:en:Hazing)를 가하는 상황이었지만, 스프루언스는 상관하지 않는 태도로 지냈다. 장교 부족에 따른 조기 졸업 정책으로 반년 일찍 1906년 9월 12일에 졸업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경력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함 펜실베이니아에서 근무하고, 뉴욕 해군 조선소 보좌 기술 장교로 임명되어 영국에서 임시 근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종전 후에는 아가멤논에서 복무하며 유럽에 주둔했던 미군을 귀국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1920년대에는 구축함 애런 워드와 퍼시벌을 지휘하고, 워싱턴 D.C. 공학국과 유럽 해군 사령관 본부에서 근무했다. 특히,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긴장 시기에 필립 앤드루스 중장의 참모장으로 근무하여 그리스 정부로부터 구세주 훈장 금십자훈장을 받았다.
1926년 해군대학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했으며, 이후 해군대학 교관, 전함 미시시피 함장 등을 역임하며 경력을 이어갔다. 1940년에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 본부를 둔 제10 해군 지구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스프루언스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함교를 운영했으며, 간결하고 명확한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번은 부하 장교가 폭뢰를 떨어뜨렸다고 보고하자, "그럼, 그걸 다시 주워서 제자리에 놓아두게."라고 침착하게 대답한 일화가 있다.[9]
1914년 대위로 진급하여 버지니아주 뉴포트 뉴스 조선소 해군 감독관으로 부임했고, 소꿉친구인 마거릿 딘과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전함 펜실베이니아 전기 담당 장교, 브루클린 해군 공창 근무 등을 거치며 전시 특례로 진급했다. 종전 후에는 이직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장인의 조언으로 해군에 남았다.[35]
1920년 구축함 "아론 워드" 함장으로 취임하여 윌리엄 할제이 중령과 함께 근무했다. 1921년 해군성 기술부 전기과장으로 취임했고, 1922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1924년 유럽 주둔 미 해군 부대 참모를 맡아 프랑스 셰르부르로 이주했다. 이후 구축함 "오즈번" 함장을 거쳐 1926년 해군대학에 입학, 1927년 졸업 후 해군 작전부 정보과에서 근무했다. 1929년 전함 미시시피 부장, 1931년 해군대학 통신 교육 부문 책임자를 역임하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3년 미국 함대 정찰함대 구축함군 참모장, 1935년 해군대학, 1938년 전함 "미시시피" 함장 등을 역임했다. 1940년 소장 진급 후 제10해군구역(카리브해와 서인도 제도) 초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푸에르토리코 기지 건설에 종사했다. 1941년 초, 어니스트 킹 소장 초대로 클레브라 섬 상륙 작전 훈련 견학에 참가했다.
3. 1. 초기 해군 복무
스프루언스는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한 11,400톤급 베테랑 전함 아이오와에 처음 배치되었다.[7] 1907년 7월, 전함 미네소타로 전출되어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백색 함대의 세계 일주 항해에 참여했다.[7]
1913년 3월부터 1914년 5월까지 구축함 베인브리지를 지휘했으며, 오스본을 포함한 다른 세 척의 구축함과 전함 미시시피도 지휘했다.[7] 1916년에는 전함 펜실베이니아의 설비를 지원, 1916년 6월 취역 이후 1917년 11월까지 복무했다.[7]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해에는 뉴욕 해군 조선소 보좌 기술 장교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임시 근무를 수행했다.[7]
귀국 후 스프루언스는 수송선 아가멤논에서 복무했고, 1919년 3월 구축함 애런 워드 설비를 위해 메인주 배스 철공소로 발령받았다.[8] 1920년 1월까지 대서양 함대와 함께 순찰하며 이 함선을 지휘했고, 이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새로 취역한 구축함 퍼시벌 지휘를 맡았다.[8]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해상 시험을 하고 태평양 함대 구축함 부대와 순찰 항해를 하는 동안 ''퍼시벌''을 지휘했으며, 1922년 5월 워싱턴 D.C. 존 K. 로비슨 제독 휘하 공학국에서 근무했다.[8] 함대 화력 통제 관련 항공기 교리 위원회 위원으로 추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8]
1924년 초까지 워싱턴에서 근무 후 유럽 해군 사령관 본부로 발령받았다.[8] 그리스와 터키 사이 긴장 시기에 필립 앤드루스 중장 참모장으로 근무, 그리스 정부로부터 구세주 훈장 금십자훈장을 받았다.[8]
스프루언스는 잡담 없이 조용히 함교를 운영했으며, 간결하고 명확한 명령을 요구했다.[9] 한번은 당황한 장교가 "함장님, 함미에 깊이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라고 보고하자, "그럼, 그걸 다시 주워서 제자리에 놓아두게."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9]
1926년 해군대학에 입학, 1927년에 졸업했다.[35] 1929년 10월부터 1931년 6월까지 USS ''미시시피'' 부사관으로 근무했고, 1940년대까지 여러 기술, 정보, 참모 및 해군대학 직책을 역임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해군대학 교관, 1938년 4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전함 USS ''미시시피''를 지휘한 후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0년 2월 26일,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해군 기지 이슬라 그란데에 본부를 둔 제10 해군 지구 사령관으로 부임, 1941년 8월 1일 임무를 마쳤다.
1914년 5월, 대위로 진급하여 귀국, 버지니아주 뉴포트 뉴스 조선소 해군 감독관으로 부임했다. 12월, 소꿉친구 마거릿 딘과 결혼했다. 조선소에서 건조한 전함 펜실베이니아 전기 담당 장교로 승선했다. 1917년 브루클린 해군 공창으로 전속, 전시 특례로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장교 부족으로 전시 특례 중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11월 종전 후, 독일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2세 포획, 개량 수송선 "아감멤논" 부사관으로 취임하여 유럽 주둔 미군 귀국 수송에 종사했다. 전후 이직을 고려했으나, 장인으로부터 "너무 정직해서 비즈니스에는 맞지 않아"라는 조언을 듣고 해군에 남았다.[35]
1920년 구축함 "아론 워드" 함장으로 취임, 이 구축함 포함 6척으로 구성된 구축대 사령은 윌리엄 할제이 중령이었다. 1921년 해군성 기술부 전기과장으로 취임, 같은 해 아버지 알렉산더가 사망했다. 1922년 중령으로 진급, 1924년 유럽·미국 해군 부대 참모를 맡아 부대가 있는 프랑스 셰르부르로 가족과 함께 이사했다. 이후 일시 귀국하여 구축함 "오즈번" 함장을 맡았다. 1926년 해군대학에 입학, 1927년 졸업하고 해군 작전부 정보과에서 근무했다. 1929년 전함 미시시피 부장으로 취임, 1931년 해군대학 통신 교육 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같은 해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3년 3월 미국 함대 정찰함대 구축함군 참모장, 1935년 해군대학에 근무했다. 1938년 전함 "미시시피" 함장으로 부임, 1940년 2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0해군구역(카리브해와 서인도 제도) 초대 사령관으로 취임, 푸에르토리코 기지 건설에 종사했다. 1941년 초, 대서양 분견대 사령관 어니스트 킹 소장 초대로 클레브라 섬 상륙 작전 훈련 견학에 참가했다.
3.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07년 7월, 스프루언스는 전함 미네소타로 전출되어 백색 함대의 세계 일주 항해에 참여했다.[7]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6년에는 전함 펜실베이니아의 설비를 지원했고, 1917년 11월까지 이 배에서 복무했다.[7] 제1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해에는 뉴욕 해군 조선소의 보좌 기술 장교로 임명되었으며, 영국 런던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임시 근무를 수행했다.[7]
1918년 11월 종전 후, 스프루언스는 독일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2세를 포획, 개량한 수송선 아가멤논의 부함장으로 취임하여 유럽에 있던 미국 병사의 귀국 수송에 종사했다.[35]
3. 3. 전간기의 활동
1907년 7월, 스프루언스는 전함 로 전출되었으며,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백색 함대의 세계 일주에 참여했다.
1913년 3월부터 1914년 5월까지 구축함 의 지휘를 맡았고, 를 포함한 다른 세 척의 구축함 및 전함 의 지휘를 맡았다.
1916년에는 전함 의 설비를 지원했으며, 1916년 6월 취역 이후 1917년 11월까지 이 배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해에는 뉴욕 해군 조선소의 보좌 기술 장교로 임명되었으며, 영국 런던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임시 근무를 수행했다.[7]
1919년 3월, 구축함 의 설비를 위해 메인주 배스의 배스 철공소로 발령받았다. 그는 대서양 함대와 함께 순찰하면서 1920년 1월까지 이 함선을 지휘했으며, 그 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새로 취역한 구축함 의 지휘를 맡았다.[8]
그는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해상 시험을 하는 동안, 그리고 태평양 함대 구축함 부대와 함께 순찰 항해를 하는 동안 ''퍼시벌''을 지휘했으며, 1922년 5월 워싱턴 D.C.로 발령받아 존 K. 로비슨 제독 휘하의 공학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그 직책을 맡는 동안 함대 화력 통제와 관련된 항공기 교리의 위원회 위원으로 추가 임무를 수행했다.[8]
1924년 초까지 워싱턴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유럽 해군 사령관 본부로 발령받았다. 그는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긴장 시기에 필립 앤드루스 중장의 참모장으로 근무했으며, 봉사에 대한 공로로 그리스 정부로부터 구세주 훈장 금십자훈장을 받았다.[8]
1926년 해군대학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했다. 1929년 10월부터 1931년 6월까지 USS ''미시시피''의 부사관으로 근무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해군대학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38년 4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전함 USS ''미시시피''를 지휘했으며, 그 후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0년 2월 26일, 스프루언스는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의 해군 기지 이슬라 그란데에 본부를 둔 제10 해군 지구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41년 8월 1일, 그는 푸에르토리코에서의 임무를 마쳤다.
1914년 5월, 대위로 진급하여 미국 본국으로 귀국했다. 버지니아주 뉴포트 뉴스 조선소에 해군 감독관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2월, 소꿉친구인 마거릿 딘과 결혼했다. 조선소에서 전함 "펜실베이니아" (BB-38)가 진수되자 동함의 전기 담당 장교로 승선했다. 1917년, 브루클린의 해군 공창으로 전속되어 전시 특례로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장교 부족이 심각해져 전시 특례로 중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11월 종전 후, 독일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2세"를 포획, 개량한 수송선 "아감멤논"의 부사관으로 취임하여 유럽 주둔 미군의 귀국 수송에 종사했다.
전후 이직을 생각했지만, 장인으로부터 "너는 너무 정직해서 비즈니스에는 전혀 맞지 않아"라는 조언을 듣고 해군에 남았다.[35]
1920년, 구축함 "아론 워드"의 함장으로 취임했다. 이 구축함을 포함한 6척으로 구성된 구축대의 사령은 윌리엄 할제이 중령이었다. 할제이는 스프루언스를 "구축함 함장으로서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과 두뇌에서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다"라고 평가했고, 스프루언스도 할제이의 통솔력과 용감한 공격 정신에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서로 가족끼리 교류하게 되었다. 1921년, 해군성 기술부 전기과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아버지 알렉산더가 사망했다. 1922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1924년, 유럽 주둔 미 해군 부대 참모를 받았다. 부대가 있는 프랑스 셰르부르로 가족과 함께 이사했다. 그 후, 일시적으로 귀국하여 구축함 "오즈번" 함장을 받았다. 전임 함장인 할제이는 교대할 때 승무원에게 "새로운 함장은 좋은 함장이 될 테니 성실함만으로 오해하지 않도록"이라고 당부했다. 1926년, 해군대학에 입학했다. 1927년, 졸업 후 해군 작전부 정보과 근무가 되었다. 이 때, 일본 대사관 주재 무관 사카노 쓰네요시 대좌와 이토 세이이치 중좌와 친교가 있었다. 1929년, 전함 "미시시피" (BB-41) 부장으로 취임했다. 1931년, 해군대학으로 돌아가 통신 교육 부문의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3년 3월, 미국 함대 정찰함대 구축함군의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1935년, 해군대학에 근무했다. 1938년, 전함 "미시시피"에 함장으로 부임했다. 1940년 2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0해군구역(카리브해와 서인도 제도)의 초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푸에르토리코 기지 건설에 종사했다. 1941년 초, 대서양 분견대 사령관 어니스트 킹 소장으로부터 클레브라 섬 상륙 작전 훈련 견학 초대를 받아 참가했다.
스프루언스는 잡담 없이 조용하게 함교를 운영했으며, 명령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내릴 것을 요구했다. 한 사건에서 당황한 한 장교가 달려와 "함장님, 함미에 깊이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스프루언스는 침착하게 "그럼, 그걸 다시 주워서 제자리에 놓아두게."라고 대답했다.[9]
3. 4. 해군대학 근무 및 진급
스프루언스는 1926년 해군대학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했다.[8] 1929년 10월부터 1931년 6월까지 USS ''미시시피''의 부사관으로 근무했다. 1931년, 해군대학으로 돌아가 통신 교육 부문의 책임자가 되었고, 같은 해 대령으로 진급했다.[35] 1933년 3월, 미국 함대 정찰함대 구축함군의 참모장으로 취임했다.[35] 1935년부터 1938년까지 해군대학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7]
1938년 4월, 전함 USS ''미시시피'' 함장으로 부임했다.[35] 1939년 12월,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7] 1940년 2월 26일, 카리브해와 서인도 제도를 관할하는 제10해군구역의 초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기지 건설에 종사했다.[35] 1941년 초, 대서양 분견대 사령관 어니스트 킹 소장으로부터 클레브라 섬 상륙 작전 훈련 견학 초대를 받아 참가했다.[35] 1941년 8월 1일, 푸에르토리코에서의 임무를 마쳤다.[7]
4.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9월, 스프루언스는 태평양 함대 소속 제5 순양함 전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스프루언스의 부대는 호놀룰루 서쪽 200마일 해상에서 진주만으로 귀환하던 중이었다. 이후 스프루언스는 할시 중장의 지휘 아래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 기습(1942년 2월), 웨이크섬 공격(3월), 둘리틀 공습(4월) 등 여러 기습 작전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
4. 1. 태평양 전쟁 발발과 초기 작전
1941년 9월, 스프루언스는 태평양 함대 소속 제5 순양함 전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당시 스프루언스가 지휘한 것은 노샘프턴, 체스터, 펜사콜라, 솔트레이크시티 등 중순양함 4척뿐이었다. 전함 부대 사령관을 원했던 스프루언스는 이에 실망했지만, 다른 임무 후보가 해군성 병기부와 대서양 함대 참모장이었기에, 워싱턴에 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여 사령관직을 수락했다. 9월, 진주만에 도착하여 기함 노샘프턴에 장기를 게양했다.[4]1941년 11월 28일, 스프루언스는 웨이크 섬에 항공기를 수송하는 임무를 맡은 윌리엄 F. 할시 주니어 중장 지휘의 제8임무 부대의 일부를 이끌고 진주만을 출항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스프루언스의 부대는 호놀룰루 서쪽 200마일 해상에서 진주만으로 귀환하던 중이었다.[4]
스프루언스는 기함 노샘프턴에서 제5순양함 전대의 중순양함 4척과 지원 함정을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구축된 기동부대의 일부였으며, 할시 중장이 지휘했다. 할시는 자신의 기동부대를 이끌고 서태평양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기습 작전을 수행했다. 1942년 2월에는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를, 3월에는 웨이크섬을 공격했으며, 4월에는 둘리틀 공습의 항공력을 일본 본토에 투사했다. 이러한 기습 작전은 사기에 매우 중요했는데, 미국 지휘관들의 공격적인 새로운 기조를 설정하는 동시에 미국 해군의 지휘관과 수병들에게 귀중한 전투 경험을 제공했다.[4]
4. 2. 미드웨이 해전

1942년 5월 셋째 주, 미국 해군 정보 부대는 일본이 6월 초까지 미드웨이 섬을 침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10] 미드웨이 점령은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발상이었다. 그는 미드웨이에 대한 강력한 공격이 하와이와 진주만을 심각하게 위협하여 미국 정부가 평화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10] 반면에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일본의 침략 함대를 반드시 요격해야 했고, 미드웨이의 해군 항공 기지에 압도적인 공격력을 투사하기 전에 적 항공모함과 싸워야 함을 알고 있었다.
진주만에서 출항하기 이틀도 안 돼 니미츠의 함대 항공모함 부대 사령관인 할시 제독이 심각한 대상 포진으로 입원했다.[11] 할시는 즉시 니미츠에게 플레처 제독이 전체 지휘를 맡고,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제독을 그의 후임으로 추천했다.[12]
1942년 5월 말, 제16임무부대 사령관 윌리엄 할제이가 피부병으로 입원하게 되자, 스프루언스는 대리 지휘관으로 지명되었다.[36] 제16임무부대는 항공모함 부대였고, 스프루언스는 항공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참전 당시 미국 해군에는 아직 항공 부문 장교가 적었고, 3명의 항공모함 부대 사령관 중 항공 부문 출신 사령관은 할제이 중장뿐이었으며, 다른 윌슨 브라운 소장, 프랭크 J. 플레처 소장은 모두 수상함 부대 출신이었기에, 스프루언스의 기용은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37]
할시는 조건으로 부관 이외의 막료는 할제이의 막료를 그대로 인계받을 것과, 기함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 둘 것을 정했다. 이를 수락한 스프루언스는 부관 로버트 올리버 중위만을 데리고 "엔터프라이즈"에 승함하여 출항, 하루 늦게 출항한 플레처 소장의 제17임무부대와 미드웨이 섬 북동쪽의 "포인트 랙"으로 불리는 지점에서 합류, 플레처 제독의 지휘 하에 당시 예상되었던 일본군의 미드웨이 섬 공략에 대한 요격 준비에 들어갔다. 제16임무부대 막료들은 스프루언스에 대해 항공 경력이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지만, 첫 회식 자리에서 스프루언스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조금의 불안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빌 할제이가 여러분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신뢰를 얻었다.
스프루언스는 순양함 사단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증명했지만, 항공모함 공중전에 대한 경험은 없었다. 할시는 니미츠를 안심시켰고, 스프루언스와 플레처에게 새로 물려받은 참모진, 특히 항공모함 전쟁에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인 마일스 브라우닝 대령을 신뢰하라고 말했다.[13] 스프루언스는 제16 기동 부대의 지휘를 맡았으며,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플레처 제독의 전투 지휘를 받았다. 플레처는 제17 기동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지만, 기동 부대의 기함 요크타운은 산호해 해전에서 심하게 손상되었고, 부대의 다른 항공모함 렉싱턴은 침몰했지만, 니미츠의 지시에 따라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작전에 합류하기 위해 "급하게" 수리되었다.[12]
미국 해군 요격 부대는 세 척의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 ''호넷'', ''요크타운''과 그들의 공습 비행대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두 그룹으로 편성된 일본 침략 함대와 맞섰다. 즉,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지휘를 받는 네 척의 항공모함과 지원 함정으로 구성된 공습 기동 부대와 곤도 노부타케 제독 등이 지휘하는 수상 및 점령 부대였다. 야마모토 제독은 기함 야마토에서 연합 침략 함대를 지휘했다.
태평양 함대 사령장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은 스프루언스에게 "일본군이 미드웨이를 점령하더라도, 우리는 나중에 천천히 되찾으면 된다, 전황이 불리하면 퇴각하라"고 말했다.[38]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지휘하여 일본 항공모함 4척을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6월 4일 0530시,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정찰기가 ''기동 부대''를 발견했다. 그러나 정찰기는 "(두) 척의 항공모함과 전함"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항로와 속도를 보고했다. 미국 정보부는 ''기동 부대''가 두 개의 별도 기동 부대로 운용될 가능성을 보고했기 때문에, 플레처는 항공모함 부대의 절반의 위치만 알고 있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플레처는 스프루언스에게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동원하여 일본을 공격하도록 명령했고, 다른 일본 항공모함이 발견될 경우를 대비하여 ''요크타운''을 예비로 두었다. 일본기들은 미드웨이 공격에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스프루언스는 일본 항공모함이 착륙하거나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공격을 받도록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해 즉시 공격을 시작하도록 명령했다. 이 상태에서 일본 항공모함은 매우 취약해질 것이었다. 또한 스프루언스는 각 비행대대를 제대로 편성하기 전에 공중 부대가 목표로 직접 비행하도록 명령했다. 적 항공모함을 혼란에 빠뜨리고 자체 반격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도박은 성공했지만, ''엔터프라이즈'' 공중 부대는 조각조각 비행하고 대부분 전투기 호위를 받지 못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6월 4일 아침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미국 공격기들은 미드웨이 근처와 일본 기동 부대 주변 해상에서 처음 몇 차례의 공격에서 심하게 격파되었다. 그 후 스프루언스의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미국 급강하 폭격기들이 나구모의 4척의 항공모함 함대로 날아갔다. 운명적으로, 그들은 공중 엄호를 받지 못했다. 나구모의 공격기 대부분은 미드웨이에 대한 첫 번째 공격에서 막 돌아와 항공모함 격납고에 묶여 있었고, 그의 전투 초계 엄호기들은 ''호넷''에서 발진한 어뢰 폭격기들과 교전 중이었다. ''엔터프라이즈'' 급강하 폭격기들은 나구모의 기함 아카기를 포함하여 두 척의 일본 항공모함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플레처가 모든 일본 항공모함을 파악했다고 확신한 후 발진한 ''요크타운''의 항공단은 소류를 무력화시켰다. 이 세 척 모두 결국 자침되었다.
남아 있는 항공모함인 히류는 다시 ''요크타운''을 손상시키는 공격을 가하며 일본에게 잠시 숨통을 트이게 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해가 질 무렵, 미국 정찰기가 다시 ''히류''를 발견했다. 플레처는 신속하게 급강하 폭격기에게 공격을 명령했고, 그 결과 네 번째 일본 항공모함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다음날 자침되었다. 그러나 ''히류''의 두 번째 공격으로 플레처의 기함 ''요크타운''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그 결과 플레처는 전투의 마무리 단계를 지휘할 스프루언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미국 해군 반격 부대는 4척의 일본 항공모함을 모두 침몰시키면서 자체적으로 ''요크타운''을 잃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 침략 함대를 격퇴하고, 결정적으로 ''기동 부대''를 파괴함으로써 미국은 해상 항공전에서 동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1949년 해군 역사가인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은 스프루언스가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수상 함대가 탈출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고 언급했다.[14] 그러나 모리슨은 전투에서의 스프루언스의 활약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썼다. "플레처는 잘했지만 스프루언스의 활약은 훌륭했다. 침착하고, 냉정하며, 결단력 있고,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광범위하게 다른 병력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도 과감하게 모든 기회를 잡았다.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는 이 전투를 통해 미국 해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 중 한 명이 되었다."[15][16]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그의 행동으로, 스프루언스 소장은 해군 우수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다음과 같이 표창되었다. "미국 태평양 함대 기동 부대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공로 ... 적 함대의 패배와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의 뛰어난 지휘 능력, 끈기, 그리고 기동 부대 운영의 끈기는 최고 수준이었다."[17] 플레처와 니미츠 모두 전투에서의 그의 역할에 대해 스프루언스에게 우수 십자 훈장을 추천했다.[18]
미드웨이 해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과달카날 전역과 함께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미드웨이 이전, 소규모의 분산된 미국 해군은 압도적으로 크고 숙련된 일본 연합 함대에 맞섰다. 미드웨이 이후, 일본이 여전히 선박과 항공기에서 일시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미국 해군과 국가는 자신감과,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얻었다. 태평양을 포위하려는 일본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서 미국 산업은 전쟁 생산을 가동할 시간을 얻었고, 결국에는 함선, 항공기, 총기 및 기타 모든 전쟁 물자 생산에서 일본에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미국 태평양 해군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 전투를 통해 미국군은 혹독한 전투 경험을 얻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얻었으며, 그 결과 일본은 그 중요한 이점을 잃게 되었다.
4. 3. 중부 태평양 함대/제5함대 사령관
1943년 8월 5일, 스프루언스는 중부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4년 4월 29일에는 제5함대로 재지정되었다. 당시 니미츠 제독은 "빅 블루 함대"를 구성하는 함대의 지휘권을 윌리엄 홀시 주니어 제독과 스프루언스 제독이 교대로 맡는 독특한 방식을 도입했는데, 홀시 제독이 지휘할 때는 제3함대 및 제38기동부대,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할 때는 제5함대 및 제58기동부대가 되었다. 함대 지휘를 맡지 않을 때는 두 제독과 참모들은 진주만에 주둔하며 향후 작전을 계획했다.[19]두 제독은 스타일 면에서 대조를 이루었다. 할시는 공격적이고 모험을 즐기는 스타일이었고, 스프루언스는 신중하고 계산적인 스타일이었다. 서로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스프루언스와 할시는 절친한 친구였다. 스프루언스는 5함대의 상륙 부대 지휘관이었던 켈리 터너 제독과 같은 까다로운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능력이 있었다. 한 가지 예외는 스프루언스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가였던 존 타워스 제독이었는데, 스프루언스는 그의 노골적인 야망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19]
대부분의 일반 수병들은 할시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대부분의 고위 장교들은 스프루언스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선호했다. 스프루언스와 할시 모두에게 복무했던 경순양함 의 조지 C. 다이어 함장은 많은 함장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할 때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할시 제독의 지휘 하에 들어가면... 다음 5분 안에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쇄된 지침은 결코 최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두 번이나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스프루언스 제독의 지휘 하에 들어가면 인쇄된 지침이 최신 상태였고, 지침에 따라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로 인해 스프루언스는 "제독 중의 제독"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스프루언스는 1944년 2월 일본 해군 기지인 트루크를 공격하는 하일스톤 작전을 지휘하여 일본 군함 12척, 수송선 32척, 항공기 249대를 파괴했다. 이 작전은 터너 제독의 부대가 동쪽으로 약 700마일 떨어진 에니웨톡 환초를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스프루언스 본인은 전함, 순양함, 구축함으로 구성된 기동 부대를 지휘하여 트루크에서 도망치는 일본 함선을 추격하여 경순양함 와 구축함 를 격침시켰다. 한 관찰자는 4성 제독이 해상 전투에 직접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치밀한 정확성으로 지휘했다고 보고했다.[21]
1943년 5월 30일 중장으로 진급하여 중부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지휘 하에 있던 병력은 다음과 같다.
종류 | 수량 |
---|---|
정규 항공모함 | 6척 |
경항공모함 | 5척 |
호위 항공모함 | 7척 |
전함 | 12척 |
순양함 | 15척 |
구축함 | 65척 |
잠수함 | 10척 |
상륙 작전용 수송선 | 33척 |
전차 상륙정 (LST) | 29척 |
유조선 | 22척 |
육군 항공대 폭격기 | 90기 |
해군 폭격기·정찰기 | 66기 |
해병대 항공기 | 200기 |
기함은 스프루언스의 고향 이름을 딴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CA-35)로 정했다. 이 배는 순양함 전대 기함 클래스의 설비밖에 갖추고 있지 않아, 이 정도의 대함대를 지휘하기에는 수용 능력이 작았지만, 지휘·명령 계통의 슬림화를 도모하는 데 있어서 막료의 수를 "인디애나폴리스"에 수용할 수 있는 범위로 제한하는 효과가 있었다. 스프루언스 이하 막료 32명이 승선했는데, 32명이라는 수는 할제이의 막료의 절반 정도의 규모였다. 이 소수 정예주의의 막료진을 칼 무어 대령이 참모장으로 묶었다. 길버트 마셜 제도 전투 (코드네임 "갈바닉 작전")의 공략전을 지휘했다. 1944년 2월 10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 무렵, 기함을 신예 전함 "뉴저지"(BB-62)로 옮겼다. 트럭 섬 공격 때, 전함 "뉴저지"·"아이오와" 이하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을 직접 지휘하여, 항공 공격으로 놓친 일본 함대의 추격을 했다.
1944년 3월, 중부 태평양 함대가 제5함대로 개칭되었다. 윌리엄 홀시의 제3함대와 교대하여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했다. 스프루언스는 제3함대 사령관 할시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아, 체스터 니미츠 대장은 스프루언스를 "장(將) 중의 장", 할제이를 "졸(卒) 중의 장"이라고 평가했다.[39] 어니스트 킹 대장은 할제이를 "머리가 나쁜 녀석", 스프루언스를 "미 해군 제독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고 평가했다.[36]
1944년 3월부터 팔라우 제도의 공격을 시작, 4월에는 공략을 완료했다. 기함을 "인디애나폴리스"로 되돌리고, 일단 진주만에 귀항한 후, 5월 28일 다시 출항했다. 1944년 6월, 마리아나 제도의 공략에 착수하여, 마리아나 해전에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해군의 기동 부대에 승리했다. 7월 9일 사이판 섬, 8월 8일에는 테니안 섬, 8월 10일에는 괌 섬이 함락되어 마리아나 제도의 공략에 성공했다. 8월 중순, 작전부장 어니스트 킹 대장의 명령으로 무어 참모장은 해임되었고, 후임 참모장 아서 C. 데이비스 소장이 부임했다. 8월 말, 사이판 섬에서 할제이 대장과 지휘권을 교대하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니미츠는 다음 목표는 대만일 것이라고 시사했지만, 스프루언스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가 좋다고 대답했다. 휴식과 다음 작전 입안 중에 1944년 10월 레이테 만 해전이 일어났고, 거기서 할제이의 맹진이 문제시되었지만, "빌 할제이는 일본에서 온 함대(오자와 함대)에 대해 정말 잘 행동했다"고 말하며 할제이를 옹호했다.
1945년 1월, 진주만을 출항하여 울리시 환초에서 지휘권을 이어받아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했다. 이 전투는 군부 내에서 비판도 강했지만, 육군 항공대 커티스 르메이 소장이 "매우 큰 가치를 가진다"고 단언했기 때문에, 작전을 단행했다. 2월 말에 이오지마 공략을 완수하자, 일단 울리시 환초로 귀환했다.
3월 14일 오키나와 전투 ("아이스버그 작전")를 향해 출항하여, 3월 18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특공에 의해, 정규 항공모함 3척이 행동 불능, 항공모함 "프랭클린"에는 폭탄 2발이 명중했다. 3월 31일에는 기함 "인디애나폴리스"에 특공기가 명중했다. 4월 5일, 전함 "뉴멕시코"(BB-40)로 기함을 옮겼다. 4월 1일, 오키나와 본섬에 미군이 상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상륙 부대의 제10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육군 중장도 주춤하여, 스프루언스를 실망시켰다. 4월 6일, 이토 세이이치 중장이 이끄는 전함 "야마토" 이하 해상 특공대를 포착하여, 모튼 데요 소장의 전함 부대에 요격을 명령했고, 동시에 함대에는 항공 부대도 연계되어 있다고 추측한 스프루언스 대장은 마크 미처 중장에게도, 하늘에서의 위협에 대처하도록 명령했지만, 공격대의 발함 준비를 마친 마크 미처 중장으로부터 "귀관에서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당사에서 공격해야 하는가"라는 타전(打電)을 받고, 즉시 "You take them"(네가 해라)라고 회신했다.
5월 12일, 임시 기함 "뉴멕시코"에도 특공기가 명중하여 전사 54명·부상 119명이 발생했다. 니미츠 원수는 사령부가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 공략 작전 도중에 할제이 제독과 교대하는 비상 수단을 취했다. 5월 28일, 할제이 제독이 전함 "미주리"(BB-63)에서 오키나와 서해안 해역에 도착하여, 지휘권을 교대하자, 수리가 완료된 "뉴멕시코"로 괌으로 귀환했다. 6월에 육상으로 사령부에 옮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본토로 휴가를 떠났고, 1주일 정도 몬로비아에서 보낸 후 곧 괌 섬으로 돌아왔다.
4. 4. 필리핀 해 해전

1944년 6월 사이판 전투에서 미국의 상륙 작전을 엄호하는 동안 스프루언스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 그는 3척의 항공모함과 2척의 유조선을 격침시키고 약 600대의 적 항공기를 파괴하여 일본 해군 항공 전력의 중추를 무너뜨렸다. (항공기와 조종사 부족으로 남은 일본 항공모함은 몇 달 후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끼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스프루언스는 필리핀 해에서의 성공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2]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전투를 명령하고 직접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에 의해 칭찬과 이해를 받았다. 해군 작전 참모총장 어니스트 J. 킹 제독은 그에게 "스프루언스, 자네는 정말 훌륭한 일을 해냈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자네의 결정은 옳았어."라고 말했다. 스프루언스의 기동부대 사령관 마크 미처는 참모장 알레이 버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4. 5. 이오지마 및 오키나와 전투
스프루언스는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해전에서의 활약으로 해군 십자 훈장을 받았다.[24]전쟁 대부분 기간 동안 스프루언스는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딴 중순양함 USS Indianapolis|인디애나폴리스영어를 기함으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오키나와 해전에서 ''인디애나폴리스''가 가미카제 공격을 받은 후, 해안 포격 부대의 낡은 전함 USS New Mexico|뉴멕시코영어로 기함을 옮겼다. 1945년 5월 12일 밤, ''뉴 멕시코''가 두 대의 가미카제 공격을 받았을 때, 스프루언스의 참모들은 스프루언스 제독이 선체 중앙에서 소방 호스를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뉴 멕시코''가 작전을 계속 수행하는 데 심각한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판단한 스프루언스는 기함으로 유지했다.[23] 이후 스프루언스는 Iowa|아이오와영어급 전함이 참모들을 위한 공간과 빠른 항공모함 기동 부대에 따라갈 속도를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전함 USS New Jersey|뉴저지영어를 기함으로 선택했다.
5. 전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 의회는 육군과 해군에 대해 소수의 5성 장군 계급(육군 원수, 해군 원수)을 만들었다. 해군은 법적으로 4명의 해군 원수로 제한되었는데, 이 중 세 명은 어니스트 킹, 체스터 니미츠, 윌리엄 D. 리히로 정해졌다. 네 번째 자리는 할시와 스프루언스 사이의 선택이었고, 오랜 심사숙고 끝에 1945년 12월 할시가 임명되었다. 스프루언스의 업적은 의회의 특별 법안을 통해 평생 동안 제독의 완전한 급여를 지급하는 특별한 영예로 인정받았다. 스프루언스는 이 문제에 대해 "빌 할시와 함께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빌 할시 대신 받았다면, 나는 매우 불행했을 것이다."라고 개인적인 소감을 밝혔다.[26]
스프루언스는 1946년 2월부터 1948년 7월까지 해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뒤 퇴역했다. 그는 연합국을 위한 공헌으로 벨기에 정부로부터 레오폴드 훈장과 금빛 야자나무 가지가 달린 전쟁 십자 훈장을 받았다.[27] 퇴역 직전, 스프루언스는 해군 장관으로부터 해군 및 해병대 표창장을 받았는데, 표창장에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당신의 눈부신 업적은 태평양에서의 우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요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당신의 대담하고 숙련된 리더십은 적의 진격을 완전히 막아냈으며, 결국 적의 항복으로 이어진 해상 항공전의 패턴을 확립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25]
1966년, 추간판 탈출증과 백내장을 앓았고, 후에 동맥 경화증이 발생했다. 1969년 봄, 장남 에드워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정신 이상을 일으켜 치매와 비슷한 상태에 빠졌다. 1969년 12월 13일,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마지막 말은 "나는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였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골든 게이트 국립 묘지에 군 최고 예우로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내 마가렛 딘(1888–1985)은 그의 옆에 묻혔다. 체스터 니미츠 원수, 리치먼드 K. 터너 제독, 찰스 A. 록우드 제독도 함께 묻혔는데, 이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 모두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는 연극 연출가 앤 보가트의 할아버지였다. 스프루언스급 구축함과 그 1번함(DD-963),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의 61번함(DDG-111)은 그를 기려 명명되었다.
5. 1. 태평양 함대 사령관 및 해군대학 총장
1945년 8월 27일, 마닐라 만에 도착한 스프루언스는 29일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와 대면했다. 맥아더와 일본에 대한 생각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훗날 맥아더라면 일본 점령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9월 2일 전함 「미주리」에서의 항복 문서 조인식에 맥아더로부터 초대를 받았지만, "니미츠가 자신의 참석을 요구한다면, 니미츠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라고 답하며 거절했고, 이때 오키나와 나카구스쿠만에서 함대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10]재일 해군 사령관 직무를 맡아 9월 15일 와카야마에 상륙, 병원선 「생츄어리」 외 2척에 수용된 미군 포로들을 위문하고 17일 요코하마항에 입항, 영국 해군의 서 버나드 로울링스 중장의 환대를 받으며 기함 「킹 조지 5세」에서 오랜만에 술을 많이 마셨다. 훗날 미국 본국으로 귀국하는 할제를 배웅하고 요코스카에서 맥아더가 이끄는 점령군 본대(진주군)의 상륙 지원, 기뢰 제거, 포로 귀국에 종사했다. 미군 병사의 강간 사건, 매독, 만취자가 잇따라 발생했기에 함대 의관 윌카츠 박사의 제안으로 재일 미 해군의 관리하에 위안소를 설치, 범죄·성병이 격감했지만, 군종 신부가 연방 의원에게 "해군이 요코스카에서 매춘을 허가하고 이를 방조하고 있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해군성은 스프루언스에게 즉시 폐지하도록 명령했다.[10]
11월, 제5함대 사령관 지위를 존 H. 타워스 중장에게 인계하고 진주만으로 돌아가 대기하다, 2주 후 니미츠 원수의 후임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그러나 불과 2개월 정도 만에 타워스 제독에게 양도하고, 1946년 2월 1일부터 해군대학 총장이 되어 1948년 7월 1일에 퇴역했다. 스프루언스는 종신 현역 원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퇴역 후에도 종신, 대장의 봉급을 받는다는 전례 없는 대우를 연방 의회로부터 인정받았다. 캘리포니아주몬터레이 반도페블 비치에서 아내와 은퇴 생활을 하다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1952년 1월 주 필리핀 대사에 취임, 1953년에 퇴임할 예정이었지만, 후에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 의해 유임되어 연장, 1955년까지 맡았다. 그 후, 페블 비치로 돌아간다.[10]
5. 2. 주 필리핀 미국 대사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스프루언스를 필리핀 주재 대사로 임명했고, 1952년부터 1955년까지 필리핀에서 복무했다.[25]1955년, 스프루언스는 미국 침례교 선교사 윌리엄 오리슨 발렌타인이 1905년에 설립한 고등 교육 기관인 중앙 필리핀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6. 사망 및 유산
스프루언스는 1969년 12월 13일 캘리포니아주 페블 비치에서 사망하여 샌프란시스코 인근 골든 게이트 국립 묘지에 군 최고 예우로 매장되었다.[30] 그의 아내 마가렛 딘(1888–1985)은 그의 옆에 묻혔으며, 그의 오랜 친구인 체스터 니미츠 원수, 리치먼드 K. 터너 제독, 그리고 찰스 A. 록우드 제독도 함께 묻혔는데, 이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 모두 합의한 사항이었다.[30] 그는 연극 연출가 앤 보가트의 할아버지였다.
구축함 는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의 선도함이며, 구축함 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0]
미국 해군대학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메인 강당은 스프루언스 홀로 명명되었다. 스프루언스 흉상이 로비에 있다.
7. 성격 및 평가
스프루언스는 활동적인 사람이었고 하루에 약 12.87km~약 16.09km를 걷는 것을 즐겼다. 교향곡을 좋아했으며, 소박한 취향을 가졌다. 담배는 피우지 않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핫 초콜릿을 즐겨 매일 아침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애완견 슈나우저 피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29] 70대에도 낡은 카키색 바지와 작업화를 신고 정원과 온실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다.[29]
해군에서의 업적은 잘 알려졌지만, 스프루언스는 자신에 대해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가족과 가까운 친구 외에는 사생활, 감정, 편견 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겸손하고 솔직했으며, 사람을 잘 판단하는 능력과 튼튼한 체질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지성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내가 조용히 있으면 깊고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내 마음은 백지 상태이다."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29]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 의회는 육군과 해군에 소수의 5성 장군 계급(육군 원수, 해군 원수)을 만들었다. 해군은 4명으로 제한되었는데, 3명(어니스트 킹, 체스터 니미츠, 윌리엄 리히)은 확정적이었다. 마지막 한 자리를 두고 할시와 스프루언스가 경합했고, 결국 할시가 임명되었다. 스프루언스의 업적은 의회의 특별 법안을 통해 제독의 완전한 급여를 평생 지급하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스프루언스는 이에 대해 "내가 5성 장군 계급을 받는 것에 대해, 빌 할시와 함께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빌 할시 대신 받았다면, 나는 매우 불행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6]
퇴역 직전, 스프루언스는 해군 장관으로부터 해군 및 해병대 표창장을 받았다. 표창장에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당신의 눈부신 업적은 태평양에서의 우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요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당신의 대담하고 숙련된 리더십은 적의 진격을 완전히 막아냈으며, 결국 적의 항복으로 이어진 해상 항공전의 패턴을 확립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25]
스프루언스는 중앙 필리핀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7]
1969년 사망 후 골든 게이트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아내 마가렛 딘과 친구인 체스터 니미츠, 리치먼드 K. 터너, 찰스 A. 록우드도 함께 묻혔다.[29]
8. 수상 내역
스프루언스는 연합국에 대한 공헌으로 벨기에 정부로부터 레오폴드 훈장과 금빛 야자나무 가지가 달린 전쟁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7] 퇴역 직전에는 해군 장관으로부터 해군 및 해병대 표창장을 받았다.[25]
1열 | 해군 십자 훈장 | 해군 공로 훈장 (인치 금성 2개) | 육군 공로 훈장 |
---|---|---|---|
2열 | 해군 표창 훈장 | 대통령 부대 표창 (별 1개) |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Overseas" 죔쇠) |
3열 | 미국 방위군 훈장 ("Fleet" 죔쇠) | 아시아-태평양 전역 훈장 (인치 전투별 8개) |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
4열 | 해군 점령 훈장 ("Asia" 죔쇠) | 필리핀 해방 훈장 (별 2개) | 구세주 훈장 (그리스) |
5열 | 바스 훈작사 훈장 (영국) | 레오폴드 훈장 (벨기에) | 무공 십자 훈장 (벨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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